2025-12-22

보조 도구에서 핵심 인프라로…리걸테크의 진화
인공지능(AI)을 앞세운 리걸테크(Legal-Tech)가 법률 서비스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문서 작성과 판례 검토 등 반복적이고 시간 소모적인 업무를 AI가 분담하면서, 법률 서비스가 고부가가치 창출을 중심으로 한 효율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최근 리걸테크 시장의 성장세가 가파르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포춘비즈니스인사이트에 따르면 세계 리걸테크 시장 규모는 올해 약 340억 달러(약 47조원)에서 2032년 635억 달러(약 88조원)로 확대될 전망이다. 연평균 성장률은 10% 안팎이다. 특히 AI 부문은 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비즈니스리서치 인사이트는 글로벌 리걸테크 AI 시장이 2027년 465억 달러(약 61조원) 규모로 확장될 것으로 내다봤다. 기술 도입이 일시적 유행을 넘어 구조적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현장서 체감하는 AI, “저연차 변호사의 든든한 조력자”
실제 실무 현장에서 느끼는 변화는 뚜렷하다. 과거 단순 자료 검색 단계에 머물던 AI는 이제 서면의 뼈대를 잡는 수준까지 진화했다.
AI 법률 서비스 전문가인 최이선 법무법인 대륜 경영총괄변호사는 “현재 AI는 사실관계 정리, 쟁점 구조화, 기본적인 법리 배열, 유사 판례 방향성 정리 등 저연차 변호사가 수행하던 서면 작성 업무를 상당 부분 보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리걸테크 기업의 AI 활용 범위도 확대되는 추세다. 최주선 네플라 대표(변호사)는 “리서치 업무에는 이미 AI가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고, 정형화된 서면이나 계약서 초안 작성에서 비교적 활용도가 있는 편”이라며 “최근 멀티모달 AI가 크게 발전하면서 증거 분석처럼 다양한 형태의 데이터를 분석하는 업무에도 활용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AI 도입은 변호사들의 업무 구성에 변화를 가져왔다. 최 변호사는 “자료 정리, 초안 작성, 구조화 작업처럼 부가가치는 상대적으로 낮은 업무를 AI가 맡게 되면서 변호사는 전략 수립과 고난도 판단, 의뢰인 및 기업과의 커뮤니케이션 등 고부가가치 업무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며 “변호사의 생산성이 전반적으로 향상되고, 산출물의 양과 질이 동시에 증가하는 구조가 형성돼 결과적으로 변호사가 더 높은 가치를 창출하고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기반이 된다”고 밝혔다.
AI 활용이 장기적으로 법률 시장의 판도 자체를 바꿀 수 있다는 전망도 내놨다. 최 변호사는 “AI로 확보된 시간과 자원을 산업군별 이해와 전문성 축적에 활용한다면, 산업별 전문 변호사가 활성화되고 기업의 법률 수요도 함께 증가하는 선순환 구조가 가능하다”고 했다. 다만 그는 “이 변화는 자동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변호사가 AI로 절감된 노동력을 고부가가치 영역으로 전환하려는 의식적 노력을 전제로 한다”며 “그 전제를 작동시키는 것이 법조계와 리걸테크 업계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리걸테크는 ‘있으면 좋은 도구’가 아니라 없으면 생존이 어려운 기본 인프라가 될 것”이라며 “기술과 법률 전문성이 균형을 이루는 구조가 될 때 리걸테크는 시장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같은 업무 방식의 변화는 통계로도 나타난다. 리걸테크 기업 로앤컴퍼니에 따르면 AI 서비스 ‘슈퍼로이어’ 이용자의 94%가 업무 시간 절감을 경험했으며, 평균적으로 시간당 약 25분의 업무 단축 효과를 본 것으로 조사됐다. 기존 대비 업무 생산성이 약 1.7배 향상된 셈이다.
로앤컴퍼니 관계자는 “업무 효율성 향상으로 전체 업무 시간이 크게 줄었다”며 “AI 도입을 통해 생산성이 높아질수록 법률 전문가는 더 중요한 업무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노동 제공자’에서 ‘서비스 설계자’로
AI 도입은 변호사의 역할에 대한 인식도 바꾸고 있다. 초안 작성과 자료 정리 등 부가가치가 낮은 업무를 AI가 맡으면서, 변호사는 △전략 수립 △고난도 법리 판단 △의뢰인과의 심층 커뮤니케이션 등 고부가가치 영역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을 수 있게 됐다.
이는 법률 시장의 수익 구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존의 ‘투입 시간만큼 비용을 받는’ 시간당 수임 중심 구조에서, AI를 통한 효율화를 바탕으로 한 성과·가치 중심 보수 체계로의 전환이다. 최 변호사는 “미국과 유럽 등 리걸테크 선진국에서는 이미 이러한 변화가 진행 중”이라며 “한국 역시 AI 활용이 확산될수록 점진적이지만 불가피하게 따라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 대표는 “시간당 수임은 일부 대형 로펌에 국한된 모델”이라며 “AI가 수익 구조 자체를 바꾸기보다는 기존 구조 안에서 로펌과 의뢰인이 모두 윈윈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주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한정된 예산 안에서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로펌의 경우, AI를 통한 효율화는 적자나 품질 저하의 악순환을 끊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다만 효율 혁신이 곧 AI로의 완전한 대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법률 문제는 사건의 맥락, 인간관계, 사회적 파장, 재판부 성향 등 비정형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AI는 어디까지나 판단을 돕는 도구이지, 판단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최 대표는 AI의 사회적 한계로 ‘결정권’을 꼽았다. 최 대표는 “기술적 한계는 너무 빠르게 바뀌고 있어 단정하기 어렵다”면서도 “인간이 AI에게 최종적인 결정권을 넘겨 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리걸테크 확산과 함께 책임 소재와 윤리 기준, 제도적 뒷받침이라는 과제도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AI 오류로 인한 법률적 문제 발생 시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지, AI 분석 결과의 신뢰도를 어떻게 검증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전문가와 업계는 우리나라가 리걸테크 선진국으로 도약할 잠재력이 충분하다고 본다. 최 대표는 “한국은 이미 전자소송이 활성화돼 모든 법률 문서와 증거가 전자화되어 있다”며 “법률 시장의 워크플로우가 이미 테크와 결합돼 있어 고도화된 신기술이 인프라로 자리 잡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기술 확산 속도에 비해 책임 기준과 윤리 가이드라인 논의는 여전히 뒤처져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효율 혁신과 함께 신뢰와 책임을 담보할 제도적 논의가 병행될 수 있을지가 리걸테크 시대 법률 시장의 향방을 가를 핵심 변수로 꼽힌다.
리걸테크 업계 관계자는 “AI는 법률가를 대체하는 기술이 아니라, 법률 서비스의 품질과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인프라”라며 “리걸테크가 시장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기술 고도화와 함께 책임 구조와 윤리 기준에 대한 논의가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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